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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에서 온 질문

이해해야 다가갈 수 있다는 착각 ― 명절 차례를 두고 아빠와 부딪혔다

by 와이직 2026. 9. 16.

명절을 앞두고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
내려가는 표는 이미 매진이었고, 반대로 올라오는 표는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내려가는 대신 부모님이 올라오시면 안 될까. 어디서 보내든 가족이 함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빠는 단칼에 거절했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야 하니 집을 비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AI 도구로 생성한 이미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게 차례는 가족을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한 의례처럼 느껴졌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의 가족이 만날 수 없다니.

가족을 이어주는 의례가 오히려 만남의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 내게는 묘한 역설처럼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서 화부터 났을 것이다.

아빠와 나는 유독 의견 충돌이 잦다. 각자의 생각을 쉽게 굽히지 않는 성향이 어쩌면 닮아서 더 부딪히는지도 모른다.
1년 전 아빠와 크게 다퉜을 때, 평소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던 오빠가 내게 한마디를 했다.

 

“아빠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얼마나 볼 수 있다고 그러냐.”

 

그 말이 당장 나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오빠와 나는 부모를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빠의 그 한마디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을 오빠는 보고 있는 걸까.

 

이번에도 왜 꼭 차례를 지내야 하는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다 또 관계가 상하는 쪽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에게는 명절 차례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일 수 있다는 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해 말했다.
“알았어. 그럼 우리가 내려갈게.”
완전히 납득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한 발 움직여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엄마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아빠와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추석 당일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올라오는 기차표를 구해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표를 구할 수 있으면 부모님이 올라오고, 구하지 못하면 우리가 내려가기로 했다.
조금 의외였다. 내가 한 발 움직이자 아빠도 자기 자리에서 한 발 움직인 셈이었다.

 

 

아빠의 행동은 그대로인데

그러다 엄마에게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다.
십여 년 전쯤 아빠가 추석 연휴에 제주도에 갈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차례를 미리 지내고 떠났는데, 제주도에서 사고를 당해 다친 일이 있었다.

엄마는 어쩌면 그 일이 아빠 마음에 계속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차례를 미리 지내고 떠났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건 아닐까 싶다고 했다.

물론 내가 직접 아빠에게 확인한 것은 아니다.
차례를 미리 지낸 것과 그때의 사고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적어도 아빠에게 차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라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다.
다만 조금 전까지는 그저 ‘왜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릴까’라고 생각했던 행동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없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조금 달라졌다.

 

AI 도구로 생성한 이미지


 

생각해보면 순서가 거꾸로였다.

보통은 상대를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야 행동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해 → 공감 → 행동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에 가까웠다.
행동 → 상대의 변화 → 새로운 맥락을 알게 됨 → 이해

내가 아빠를 먼저 이해했기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 먼저 한 발 움직였다.

그러자 아빠도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야 나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아빠의 이야기를 하나 알게 됐다.

이해가 관계를 바꾸기도 하지만, 관계를 위한 작은 노력이 이해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하게 됐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 관계를 어떻게 지켜내고 싶은가’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것.

아빠와 나는 앞으로도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다를 것이다.

이번 일로 내가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도 아니고, 아빠가 자신의 생각을 버린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서로 자기 자리만 고집하는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한 발씩 움직였다.

 

AI 도구로 생성한 이미지

 

 

가족이라고 해서 저절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오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아빠는 원래 그렇다고.
엄마는 원래 그렇다고.
나는 저 사람을 이미 잘 안다고.

 

더 이상 묻지 않을 때가 있다.

 

이번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먼저 한 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에야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이해는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질문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한 발 다가갈 수 있을까?

 

오늘의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