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여러 인물의 생각이 예고 없이 오가는 소설이라 읽는 내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마지막 파티 장면은 오래 남았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지위와 교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세련되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내 눈에는 모두가 자기만의 가면을 쓴 채 서로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클래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의 클래리사라기보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분위기를 살피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파티를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지만, 정작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누구와 나누고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페르소나를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자신은 감춘 채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내보이는 일.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런 가면을 벗고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생각을 남편에게 말하자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페르소나를 쓰지 않으면 사회성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 아닐까?”
처음에는 쉽게 동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화가 난다고 떠오르는 말을 모두 내뱉고, 기분이 나쁘다고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을 진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살아가기 위해 표현을 고르고 행동을 조절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직장에서는 맡은 역할에 맞게 행동하며, 가까운 사람에게도 상처를 줄 말은 한 번 더 생각한다.
그렇다면 페르소나는 진짜 나를 감추는 가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고려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얼굴일 수도 있다. 솔직함과 무절제한 표현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페르소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보여주는 사회적 모습이라는 넓은 의미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의식적으로 선택한 모습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반복되어 성격처럼 굳어진 모습일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얼굴
그리고 남편은 한 가지 의견을 더 보탰다.
어떤 페르소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의식적으로 학습한 것이 아니라, 집단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은 오랫동안 집단을 이루어 살아왔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받고 협력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반대로 집단에서 배제되거나 위험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은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타인의 평가와 평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페르소나 하나하나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배제에 대한 두려움이나 소속되고 싶은 욕구에는 진화적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얼굴을 만들어내는지는 자라온 환경과 문화,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모습들이다.
-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좋은 사람'을 자처하는 모습
- 무능함을 숨기기 위해 모르는 것도 아는 척 넘기는 태도
-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무심한 척 거리를 두는 관계 방식
- 버림받지 않으려고 상대가 원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는 것
- 약해 보이기 싫어서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태도
이런 얼굴은 필요할 때 꺼내 쓰기로 결정한 가면과는 다르다. 오랜 시간 반복되면 본인도 그것을 페르소나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페르소나는 의도적으로 선택한 가면일까, 아니면 삶을 견뎌내며 저절로 굳어진 얼굴일까.

아마 둘 모두에 해당할 것이다. 어떤 모습은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 의식적으로 채택하고, 어떤 표정은 상처와 거절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켜켜이 쌓인 결과가 아닐까? 처음에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너무 오래 사용한 나머지 이제는 그것이 가면인지 내 성격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만약 내가 본래 성격이라고 믿는 모습도 페르소나일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나는 내가 왜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모를 수 있다. 친절해서 배려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미움받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고,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감정을 눌러왔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슷한 갈등이 반복될 때, 가까운 사람이 내가 미처 몰랐던 모습을 말해줄 때, 혼자 기록하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때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로 나 역시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혼자 생각했을 때는 페르소나를 가식으로만 보았다. 하지만 남편과 대화하면서 그것이 사회성이거나 오래된 자기보호일 수도 있다는 관점을 만났다. 혼자서는 보지 못했던 생각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완전히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도 몰랐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면을 벗으면 진짜 내가 남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불교의 무아(無我)가 떠올랐다.
무아는 단순히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나라고 붙잡는 몸과 감정, 생각과 성격도 여러 조건에 따라 계속 달라지므로, 그 모든 것 뒤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관점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페르소나를 모두 벗으면 그 뒤에서 진짜 내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면을 하나씩 벗겨낸 끝에 단 하나의 고정된 얼굴이 반드시 남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직장에서의 나, 친구와 있을 때의 나, 배우자와 있을 때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고 하나만 진짜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여러 관계와 조건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이 함께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짜 나를 안다는 것은 모든 가면을 벗겨내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어떤 얼굴을 쓰고 있는지, 그 얼굴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도 나에게 필요한지를 알아가는 일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가면보다 중요한 것
페르소나는 대체로 나를 보호하거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갈등을 줄이고 내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얼굴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페르소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를 가식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감정을 조절하는 얼굴과, 중요한 사실을 감추어 상대를 속이는 얼굴은 같지 않다.
문제는 가면의 존재보다 그 가면이 너무 단단해졌을 때 시작되는 것 아닐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정작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강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숨긴다.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만든 얼굴이 오히려 나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모든 가면을 벗고 어떤 감정이든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먼저 내가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도 나와 관계를 보호하는 얼굴인지, 아니면 오래전에는 필요했지만 이제는 나를 가두고 있는 얼굴인지 물어보는 일이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전까지 나는 페르소나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책을 읽고 난 직후에는 그것을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사람과의 대화를 거치며 생각은 흔들렸고, 질문은 처음보다 복잡해졌다.
페르소나는 진짜 나를 감추는 가면일까, 타인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얼굴일까.
우리가 필요에 따라 선택한 모습일까, 아니면 관계와 경험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 모습일까.
그리고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모든 가면을 벗는 일일까, 내가 어떤 가면을 왜 쓰게 되었는지 알아가는 일일까.
아직 하나의 답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처음과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페르소나가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얼굴을 왜 쓰고 있는지, 그리고 필요할 때 그 얼굴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질문
페르소나는 의도적으로 선택한 가면일까, 아니면 삶을 견뎌내며 저절로 굳어진 얼굴일까?

참고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민음사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ind in Indian Buddhist Philosophy
Evolutionary Human Sciences, No good deed goes unpun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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