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무언가를 명쾌하게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계속 흔들어 놓는 책.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이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AI 도구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된 진짜 시작의 이유는 내가 오래전부터 붙잡고 있던 하나의 질문이었다.
능력이나 실력이 뛰어나다면, 인성에 문제가 있어도 괜찮을까?

이 질문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예전에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한중일이 선호하는 삼국지 인물이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방송에서는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제갈량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를 통해 각 나라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다르게 드러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각 나라 사람들의 성향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제갈량에게 특별한 인성적 문제가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사람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데 ‘능력’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략이 뛰어나고, 실력이 출중하며,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쉽게 감탄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졌다.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 실제로 결함이나 인성적 문제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때도 같은 기준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타짜』의 고니와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프랭크 애버그네일.
두 인물 모두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들의 능숙함과 자신감, 비범한 재능에 감탄한다. 분명 잘못을 저지르는 인물인데도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위기를 빠져나가기를 바라거나, 심지어 성공하기를 응원하는 나를 발견한다.
잘못을 판단하는 나와 능력에 감탄하는 내가 동시에 존재했다.
그때부터 이 질문은 단순히 영화 속 인물을 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감정을 이해하고 싶은 질문이 되었다.
『불안』은 우리가 왜 능력에 끌리는지 생각하게 했다
그러다 읽게 된 책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지위 불안’이라는 하나의 명제에서 출발해, 인간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사회적 관계를 깊이 파고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확인받으려 한다.

『불안』을 읽으며 나는 현대사회에서 능력이 성공과 지위, 타인의 인정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매혹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능력 그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능력이 가져오는 성공과 인정,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함께 끌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뛰어난 사람의 잘못이나 결함에 조금 더 관대해지는 이유도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불안』은 이 질문에 대한 윤리적 답을 주는 책은 아니었다. 왜 인간이 성공과 지위에 매혹되는지는 생각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한 사람의 잘못을 어디까지 용인해도 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바로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이었다.
정답 대신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책
『괴물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을 예상보다 훨씬 깊고 복잡한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책에는 성범죄를 저지른 예술가, 가정과 아이를 떠난 여성 작가와 음악가, 반유대주의적이거나 차별적인 관점을 드러낸 창작자 등 다양한 ‘괴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작품은 위대하다고 평가받지만, 그들의 삶과 행동까지 위대했던 것은 아니다.
클레어 데더러는 이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 정리하거나 독자에게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 우리는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매혹되는가?
- 왜 한때 사랑했던 작품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가?
- 왜 우리는 잘못의 종류와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가?
- 작품과 창작자를 정말 분리할 수 있는가?
- 그리고 작품을 소비하거나 거부하는 행위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윤리적 의미가 있는가?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의 작품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잘못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는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한다.
나 역시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 뛰어난 스포츠 선수에게는 나도 모르게 판단 기준이 달라질 때가 있었다.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연기나 경기력만큼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앞으로 만들어낼 작품이나 보여줄 활약을 계속 보고 싶다고 느끼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과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마다 임계점이 있는 것 같아.”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내 주변의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절대로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할 일도, 유명한 배우나 예술가, 감독, 스포츠 선수에게는 허용 범위가 조금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또 같은 유명인의 문제라고 해도 남녀관계처럼 사생활의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문제와, 명백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준 범죄를 받아들이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잘못의 종류와 정도, 피해의 크기에 따라서도 사람마다 선을 긋는 지점은 달라진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사람마다 임계점이 있었고,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도 그 범위는 달라졌다.
예술가의 결핍과 자유, 그리고 야만성
『괴물들』을 읽으며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 중 하나는 예술가의 창조성과 그들이 가진 결핍, 충동, 자유로움, 때로는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면이 서로 완전히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점이었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 안에서만 안전하고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감탄해 온 강렬하고 파격적인 작품들이 과연 모두 가능했을까.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금기를 넘나들고, 자신의 어두운 충동까지 들여다보는 태도가 창작에 특별한 힘을 부여할 수도 있다.
예술가는 때로 사회가 억누르는 감정이나 인간의 어두운 면을 대신 드러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 내면의 야만성이나 파괴적 충동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작품의 깊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팬들은 그들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결핍과 어둠, 야만적 충동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과 현실에서 타인을 해치는 행동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창작을 위해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도 예술가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피하는 것 역시 다르다.
예술가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이 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침해해도 된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창작자가 가진 결핍이나 야만성이 작품의 힘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해서, 현실에서 저지른 가해까지 작품을 위한 필연적인 대가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을 해치고도 책임지지 않는 삶이 위대한 예술을 위한 필수 조건처럼 받아들여져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런 작품을 보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보여준 감정의 모순
내가 읽기에 클레어 데더러는 마지막까지 하나의 보편적인 정답을 내리기보다, 인간이 이미 사랑해버린 예술 앞에서 겪는 감정적 모순을 끝까지 바라보려 한 것 같다. 한 사람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만든 작품에 얽힌 나의 경험과 기억까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우리가 누구였는지, 어떤 시절을 살았는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작품에 매혹될 수 있다. 저자 역시 그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괴물의 행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작품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의 모순을 인정하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나도 그 태도에는 공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에 뛰어난 능력과 작품 앞에서 흔들린다. 좋아했던 것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지워버리는 일도 쉽지 않다. 어떤 대상을 판단할 때 나의 감정과 경험이 개입된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감정적인 인간이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에 따라 판단 기준을 바꾸는 동물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관대해지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엄격해진다. 뛰어난 능력과 성공 앞에서는 평소 중요하다고 말하던 윤리적 기준마저 흔들릴 수 있다.
인간은 감정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성찰할 수 있다. 감정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더라도 그 감정이 곧바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는 이성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잘못을 용인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핍과 자유, 충동과 야만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의 일부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타인을 해친 행동의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야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 작품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한 창작자를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작품과 능력에 계속 열광하면서 모든 잘못을 눈감아준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뛰어난 결과만 만들어내면 이 정도의 행동은 허용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에 감탄하며, 어디에서 선을 긋는지는 적어도 내가 어떤 기준을 가진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임계점은 필요하다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도달한 현재의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마다, 대상마다, 잘못의 종류마다 그 범위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각자에게는 넘지 말아야 할 임계점이 필요하다.
다만 그 임계점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직 나도 알지 못한다.
- 사생활의 문제와 명백한 범죄를 같은 기준으로 볼 수 있을까.
- 순간적인 잘못과 반복적으로 타인을 해친 행동은 같은가.
-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진 사람과 끝까지 회피하는 사람을 똑같이 판단해야 할까.
- 피해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면 작품을 소비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대상에 따라 임계점의 범위가 달라질 수도 있고, 잘못의 주제와 피해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시대와 사회의 기준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이 질문들에는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고 고쳐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졌다.
뛰어난 능력 앞에서 임계점 자체를 없애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책은 내게 하나의 정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품었던 질문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질문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새로운 질문이 자라나게 했다.
이것이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질문을 통과하면서 내가 어디에서 동의하고 어디에서 멈추는지 살펴보는 것. 그렇게 흔들리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나에게 가능한 하나의 주관을 만들어가는 것.
『괴물들』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오늘의 질문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 사람의 잘못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즉, 뛰어난 능력 앞에서 나는 어떤 임계점을 가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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