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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온 질문

우리는 왜 사유를 잃어버렸을까 -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고

by 와이직 2026. 8. 3.

요즘은 무엇이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른 답을 얻는 데 익숙해졌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하고, 긴 글은 요약해서 읽는다. 영상은 배속으로 보고, 생성형 AI는 몇 초 만에 글과 이미지, 보고서를 만들어 준다. 정보를 찾고 결과물을 만드는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무언가를 읽다가도 알림이 오면 곧바로 화면을 바꾸고, 잠시 시간이 생기면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은 어느새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됐다.

 

우리는 언제부터 '생각하는 시간'보다 '답을 얻는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으며 그 질문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우리는 왜 사유를 잃어버렸을까."

 

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해당 표지는 인용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음)

 

 

더 이상 우리를 통제하는 사람은 없다

한병철은 오늘날의 사회를 과거의 '규율사회'와 구분한다. 규율사회에서는 명령과 금지가 있었다. 병원과 감옥, 공장처럼 정해진 규율 속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명령을 따르는 복종적 주체였다.

하지만 오늘날 21세기의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했다. 성과사회의 사람들은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성과주체가 되었다. 이제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조금 더 할 수 있어."
"조금 더 잘해야 해."
"조금 더 빨라져야 해."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쉬는 시간에도 뒤처질까 불안하고, 충분히 잘하고 있어도 만족하지 못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늘날 가장 무서운 감옥은 남이 만든 감옥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병철은 우울증과 번아웃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에서 자기 자신과 끝없는 경쟁을 벌인 결과라고 말한다.

 

 

AI는 성과사회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성과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산성과 효율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AI는 그 속도를 한층 더 높였다. 긴 문서를 요약하고, 글을 쓰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질문에 답하는 일까지 이제는 몇 초면 가능하다. AI는 분명 훌륭한 도구다. 반복적인 일을 줄여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도록 도우며,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지식에 접근하게 해준다. 문제는 AI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과정을 너무 쉽게 생략하게 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EBS 특별기획 《다시, 읽기로》를 보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AI가 대신 읽어준 책을 이해하는 것과 내가 한 문장을 붙잡고 오래 고민하는 것은 정말 같은 경험일까.

영상 속 전문가들은 AI가 요약한 내용을 빠르게 이해하는 것과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가는 경험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그만큼 생각의 과정은 짧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튜브 EBS 특별기획《다시, 읽기로》1,2부 썸네일

 

 

멀티태스킹은 정말 뛰어난 능력일까

우리는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문서를 작성하고, 영상을 틀어둔 채 다른 화면을 보고, 여러 창을 빠르게 오간다.
그러나 『피로사회』에서는 멀티태스킹을 문명의 진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깊이 몰입하는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극 사이를 이동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말한다.

한병철은 이런 상태를 야생동물에 비유한다. 동물은 먹이를 먹으면서도 주변을 경계하고, 위험에 즉각 반응해야 한다. 한 대상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알림에 반응하고, 새로운 정보를 확인하고, 또 다른 화면으로 이동한다.


한병철은 인류의 문화적 성취는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문화는 빠르게 주의를 전환하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 앞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심심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한 문장을 오래 붙잡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깊은 심심함'이 사라진 사회

심심함은 흔히 없애야 할 지루함으로 여겨진다.

잠깐의 빈 시간이 생겨도 우리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열고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하지만 한병철은 심심함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깊은 심심함은 단순히 할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외부의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안에서 천천히 자라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이다.
아무 목적 없이 걷다가 갑자기 생각이 이어지고, 책을 덮은 뒤에도 한 문장이 머릿속에 남고,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통찰과 사유는 바로 그런 조용한 시간 속에서 생겨날지도 모른다.

 

 

기계는 머뭇거리지 못한다

『피로사회』에서 가장 오래 남았던 문장이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AI를 떠올렸다. 지치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으며 요청받은 결과물을 계속해서 생성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만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춰서 읽던 문장을 다시 읽고,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의심한다.

쉽게 내렸던 판단을 되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한다.

“잠깐.” “왜 그런가.” “정말 이것이 맞을까.”

 

이러한 머뭇거림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로 이 멈춤 속에서 질문이 생기고,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AI는 생각의 속도를 높여주지만, 사유의 깊이는 대신할 수 없다.

 

 

사색,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한병철이 말하는 사색적 삶은 모든 활동을 멈추고 단절하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밀려오는 자극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능력에 가깝다.

  • 알림이 왔다고 곧바로 확인하지 않는 것
  • 모든 빈 시간을 콘텐츠로 채우지 않는 것
  • 빠르게 결론 내리지 않는 것
  • '모르겠다'는 상태에 조금 더 머물러보는 것

한병철은 이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생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 깊어지지 않는다.
사색은 무작정 생각의 양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가끔은 잠시 멈춰 지금까지의 방향을 돌아볼 때 비로소 깊어질 수 있다.

유튜브 빅퀘스천 Big Questions 《삶, 멈춰서서 바라보다》 -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철학자’편

 

 

사유를 회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독서

EBS 특별기획 《다시, 읽기로》 는 AI 시대에 읽기가 왜 필요한지를 물으며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책을 읽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었다.

  • 한 문장을 천천히 읽는 것
  •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멈추는 것
  • 질문하며 읽는 것
  • 나의 경험과 연결해 보는 것
  • 읽은 뒤 자신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 보는 것

이러한 읽기는 정보를 빠르게 얻기 위한 수단과는 다르다.
검색이나 요약본을 이용하면 책의 내용을 훨씬 빠르게 알 수 있지만, 독서의 가치는 정답을 얻는 데만 있지는 않다.
어떤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읽고,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해 이유를 생각하고,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다. 독서는 효율적인 활동이 아닐 수 있다.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다른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린 과정이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빠르게 답하는 능력보다 쉽게 답하지 않는 능력

AI 시대에 인간이 모든 일을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술은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고, 우리는 AI의 도움으로 더 빠르고 편리하게 많은 일을 처리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AI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AI가 만들어 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그 답 앞에서 다시 질문할 수 있는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AI는 생각의 속도를 높여주지만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 어떤 답을 의심해야 하는지, 그 답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대신 결정해 주지 못한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사유는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수많은 정보 사이에서 잠시 멈추고,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일 것이다.

AI가 가장 잘하는 일은 빠르게 답하는 일이고, 인간이 지켜야 할 능력은 쉽게 답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질문

우리는 왜 사유를 잃어버렸을까요?

정보와 속도가 넘쳐나는 오늘 하루, 잠시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책 한 페이지를 천천히 음미하거나, 아무 목적 없이 산책을 해보는 것도 좋다.

사유는 언제나 잠시 멈춰 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오늘의 질문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