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두 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고, 타인은 모르는 모습까지 공유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족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을 너무 오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인간을 ‘딸’, ‘아내’, ‘남편’, ‘아버지’라는 역할 속에 가두고,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모습으로만 판단하면서 말이다.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와 《아메리칸 뷰티》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작품이다.
한 작품은 조현병 증상을 보인 딸과 그 병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족의 오랜 시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작품은 미국 중산층 가정의 균열을 풍자적으로 그린 극영화다.
형식도 배경도 전혀 다른 두 영화지만, 내게는 결국 같은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왜 가족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가

사랑했기에 최선이라고 믿었던 선택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보는 동안 수많은 질문이 교차한다.
처음에는 답답함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왜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을까. 왜 딸의 병을 인정하지 못했을까. 왜 가족 안에서만 해결하려 했을까.’
그러나 러닝타임이 이어질수록 질문의 화살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하게 된다.
‘나였다면 달랐을까. 우리 가족이었다면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그 부모에게는 어떤 두려움과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부모가 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부모였기에 자신의 손으로 딸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왜 그들이 딸의 병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부모로서 느낀 두려움과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 의료 전문가로서 자신의 판단에 품었던 확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외부의 도움보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방식을 앞세웠다.

문제는 바로 그 확신이었다.
딸이 실제로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보다 부모가 생각하는 ‘옳은 방법’이 우선되었다. 보호하려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통제가 되었고, 가족 안에서 해결하려는 선택은 딸을 오랫동안 적절한 치료와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렇게 딸의 삶에서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들의 선택이 딸에게 남긴 결과는 분명 무거웠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악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자신들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더욱 묵직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선택은 정당해질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확신이 오히려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를 가로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역할에 갇힌 사람들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역시 가족 안에서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그는 가장이지만 집 안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아내에게는 무능하고 초라한 남편으로, 딸에게는 소통할 수 없는 아버지로 여겨진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가족들은 늘 레스터를 보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얼마나 외롭고 공허한지는 보지 못한다.
그러나 레스터 역시 다른 가족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딸의 불안과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가 무엇을 갈망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같은 집에 살지만 서로를 한 사람으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대신 익숙한 역할로만 상대를 판단한다.

무능한 남편 /성공에 집착하는 아내/ 반항적인 딸
그렇게 이름 대신 역할이 남고, 이해 대신 평가가 쌓여간다.
레스터는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며 변하기 시작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운동을 하고, 오래전부터 타고 싶었던 자동차를 산다. 가족과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해온 기준에서 벗어나 억눌렀던 욕망을 좇기 시작한다.
그 변화에는 분명 해방의 성격이 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온 사람이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온전히 긍정하기는 어렵다.
레스터를 움직인 가장 큰 동력은 가족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억눌린 욕망에 가까웠다. 그는 무기력한 가장이라는 역할에서는 벗어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성숙한 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는 때로 무책임과 자기중심성으로 흘러간다.
그 역시 자신에게 합당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두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의 부모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으로 딸을 집 안에 머물게 했다.
반면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는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선택했다.
한쪽에서는 사랑과 보호라는 명분이 통제로 이어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아를 되찾으려는 욕망이 가족에 대한 무책임과 단절로 이어졌다.

물론 두 선택이 초래한 결과와 책임의 무게까지 같다는 뜻은 아니다. 딸의 치료와 삶에 장기간 영향을 미친 부모의 결정과 레스터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은 그 성격과 결과가 다르다.
다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여길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합당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가족을 대할 때조차 그렇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이기적이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이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에게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행동한다.
그 이유들은 당사자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은 다를 수 있다.
부모에게는 보호였던 일이 딸에게는 고립이 되었다. 레스터에게는 해방이었던 행동이 가족에게는 무책임과 단절로 느껴질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존재한다고 해서 행동이 남긴 결과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가족 관계에서는 그 차이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렵다. 사랑과 책임이라는 명분이 강하고, 서로를 잘 안다는 확신이 판단을 가리기 때문이다.
가까움이 이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가족을 한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모두 지우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부모는 부모이고 자녀는 자녀이며, 부부에게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다만 그 역할보다 먼저, 한 사람의 감정과 욕구, 두려움과 선택을 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뜻에 가깝다.
- 내 딸이기 전에 하나의 독립된 삶을 가진 사람이고,
- 내 남편이기 전에 외로움과 욕망을 가진 인간이며,
- 내 부모이기 전에 불완전한 판단과 두려움을 지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가족을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마침내 자녀가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부모의 사랑이 진정으로 성숙했는지는 자녀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뒤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를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랑은 상대를 내 곁에 붙잡아두는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이 나로부터 멀어져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랑한다는 마음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의 부모 역시 딸을 사랑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사랑의 존재 여부만으로 그 사랑이 상대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사랑은 집착이나 소유욕, 이기심과 다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상대를 얽매지 않고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상대를 나의 일부나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분리된 삶과 의지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을 강요하기 전에 상대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살피는 것.
이런 것들이 사랑을 통제가 아닌 존중으로 남게 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사랑은 때로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상대를 통제하게 만들고, 익숙함은 “내가 너를 잘 안다”는 확신으로 상대의 말을 듣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나 자신을 되찾겠다는 욕망 역시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가족에게는 사랑만큼이나 자기 확신을 의심하는 태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있는가.
이 선택은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인가.
혹시 상대를 위한다는 말로 나의 두려움이나 욕망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뒤늦게 이해한 뒤에 남는 것
두 영화에는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
그러나 내게 죽음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 것은 한 사람의 삶을 너무 늦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족이 겪어온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야 상대의 연약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을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제목은 더 이상 한 가족만의 질문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관계가 어긋난 뒤, 시간이 지나버린 뒤, 누군가를 잃고 난 뒤에야 자주 묻는다.
“그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물론 실제 상황을 모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정답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책임, 사랑과 체면, 욕망과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완벽하게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다만 상대를 사랑한다는 확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는 있다. 내가 옳다는 판단을 잠시 의심하고,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했던 일은 정답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다 안다고 너무 빨리 확신하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질문
우리는 왜 가족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가.
가족을 위한다고 했던 선택이 실은 나의 두려움이나 욕망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가족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면서도 나 역시 그들을 익숙한 역할 속에 가두어두지는 않았는가.
가장 가까워서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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