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톤 체호프의 소설들을 읽다가 역자 해설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문장을 보았다.
“진리가 가치를 지니려면 현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한 문장이 제가 최근 고전들을 읽으며 느꼈던 모호한 감정들을 선명하게 정리해주었다.
책을 통해 얻으려는 '삶의 진실'이 과연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문학이 진리를 전하는 두 가지 길
세상에는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두 가지 큰 길이 있다.
1) 상상이라는 렌즈로 비춰보기
프란츠 카프카나 조지 오웰처럼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들이다.
사람이 벌레로 변한다거나 『변신』, 동물들이 농장을 점거해 정치를 하는『동물농장』,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등이있다. 이들은 현실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왜곡함으로써, 도리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찌른다.

2) 현실이라는 거울로 정면 응시하기
반면 안톤 체호프나 테네시 윌리엄스는 지독할 정도로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 그 자체에 집중한다.
환상이나 비유의 가림막을 걷어내고, 우리 옆집에서 들릴 법한 한숨 소리와 일상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저는 요즘 이 후자의 작가들이 건네는, 즉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진리'의 힘에 깊이 매료되어 있다.
작가의 삶이 문장이 되기까지
도대체 어떤 경험과 사색을 거쳤기에 이토록 서늘하고도 따뜻한 현실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그들의 삶에 있었다.
안톤 체호프는 평생 의사로서의 삶을 병행했다. 매일같이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을 보며 인간의 가장 밑바닥 현실과 마주했다. 그에게 인간이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고 죽어가는 실체였기에 그의 소설은 소박하지만 정확하다.
『검은 수사』 에서 말하는 꿈과 현실의 조화, 『6호 병동』의 고독한 투쟁, 『대학생』의 희망,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의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한 공허와 자아에 대한 대립의 현재 진행형은 모두 그가 직접 진료하고 관찰한 '인간'이라는 데이터에서 나온 진리들이다.
테네시 윌리엄스 역시 지독한 가족사와 불안정한 현실을 온몸으로 통과한 작가다.
그의 대표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속 블랑시와 스탠리는 작가 자신이 겪었던 환상과 현실의 처절한 충돌 그 자체이기도 하다.그가 묘사하는 욕망과 나약함은 머릿속에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기록해야만 했던 삶의 파편들이었다.

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작가의 세월이 담긴 책
최근 한 인터뷰에서 김종원 작가는 책을 고르는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세월이 담겨 있는가, 그리고 나를 글쓰기 포기하게 만드는 책인가."
김종원 작가님의 이 말은 내가 체호프와 테네시의 문장을 읽으며 느꼈던 묵직한 감정의 정체와 딱 맞닿아 있다.
글쓰기 기교나 화려한 문장은 배운다면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겠지만, 작가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갈아 넣어 통과해온 그 '세월의 무게'만큼은 결코 따라 할 수가 없다. 지독할 정도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길어 올린 그들의 문장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나는 죽어도 이런 글은 못 쓰겠구나" 싶을 정도로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그 진심 어린 문장들이, 오히려 나를 다시 책 속으로 끌어들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정답이 아닌 '시야'를 선물하는 책
이들의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읽은 뒤 곱씹을 때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어떤 거창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인간의 나약함과 현실의 민낯을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뉴필로소퍼 (VOL.33)에서 말하듯 "누군가의 시야를 넓히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지독한 사실주의 문학은 우리가 가졌던 편견의 도수를 조금씩 맞춰준다.
타인의 비루함에서 나의 그림자를 보고, 타인의 방황에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우리의 시야는 비로소 한 뼘 더 넓어진다.

오늘의 질문
여러분은 현실을 똑바로 보여주는 책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상상을 통해 도피하게 해주는 책을 좋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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